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키워드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영혼들과 함께

  • 김동석 기자
  • 입력 2026.09.16 22:42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002.png

 

아비로우와의 만남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사역의 시작


저는 중앙아시아 선교사 김동석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도 이제 10년이 넘었습니다. 이 글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펼쳐진 우리의 사역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특히 아비로우라는 현지인 문화 조력자와 함께 이루어낸 일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비로우는 34세의 우즈벡 남성으로, 타슈켄트 외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2010년의 어느 겨울 인천 남동공단 우리들의 사역지에서 였습니다. 그는 돈을 벌려고 한국에 갔으나 안 좋은 공장 사장을 만나 곤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를 우리 목사님이 도와서 다시 자기 나라에 올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이 그와 함께 부화기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겪어보니 아비로우가 매우 영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이 주류인 나라이므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한국에서 아비로우는 우리 아둘람 공동체를 통해서인지 목사님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마음이 주님께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의 제안에 따라 우리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부화기 사업을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비로우가 주님을 진심으로 믿기로 결단한 것은 약 3개월 후였습니다. 그의 결단은 단순한 종교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 인생을 바꾸는 결정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고, 사회에서 낙인찍힐 수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로우는 자신의 신앙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제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고려인 공동체와의 만남 그리고 뿌리 찾기 사역


우즈베키스탄에서 저를 가장 놀라게 한 일 중 하나는 고려인 공동체의 존재였습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지금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슈켄트에는 약 1,500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으며, 타시야르간이라는 도시에는 더욱 많은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려인 공동체를 알게 된 것은 아비로우를 통해서였습니다. 아비로우는 자신의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한 할머니를 제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이름은 박순희(82세)였습니다. 박순희 할머니는 3세대 고려인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고 자란 분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한반도에 대한 향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한국 음식을 소중히 여겼으며, 한국 문화를 자신의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전수하려고 애썼습니다. 박순희 할머니를 만난 후, 저는 타슈켄트의 다른 고려인 공동체들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고려인 사회의 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젊은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한국말을 못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붕괴였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보면서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고,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아비로우와 함께 우리는 고려인 공동체를 위한 사역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타슈켄트의 고려인 지도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박순희 할머니를 통해 우리는 박일호(78세)라는 한 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박일호는 타슈켄트 고려인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소비에트 시절 한인학교의 교사였으며, 지금도 고려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박일호와 여러 번 만났고, 그를 통해 고려인 공동체의 깊은 필요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박일호가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고려인 자녀들을 위한 한글 교육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한글을 모르고, 한국 역사를 모른다면, 그들은 정말로 뿌리 없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제발 우리의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아둘람 한글학교의 설립과 그 영적 의미


아비로우와 저는 즉시 한글학교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학교를 "아둘람 한글학교"라고 명명했습니다. 아둘람은 다윗이 어려울 때 피난처가 되었던 그 아둘람의 동굴처럼, 우리 학교도 고려인 자녀들과 현지인들의 영혼의 피난처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학교 설립을 위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교실 공간을 마련해야 했으며, 우리 형제들 중 과거에 교사를 형제들이 그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들은 부족함들이 많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타슈켄트의 한 상점 건물의 2층을 임차할 수 있었습니다. 임대료는 매우 저렴했는데, 이는 건물 주인이 우리의 사역 목표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알리야(45세)라는 여성이있었습니다. 알리야는 원래 우즈벡인이지만, 고려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한국 문화에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교사는 누르굴(38세)이었습니다. 누르굴은 고려인으로, 어려서부터 한글을 배웠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정규 교사 자격은 없었지만, 자신의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2020년 3월, 아둘람 한글학교는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첫날 학교에는 14명의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가장 어린 학생은 6세 소녀 루나(유즈베키스탄 이름: 루나 아부박로바)였고,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은 17세 소년 아르타얀(우즈벡 이름: 아르타얀 투르술료프)이었습니다. 학교의 첫 수업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한글 자음과 모음을 배우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ㄱ, ㄴ, ㄷ"을 따라 쓸 때의 그 순수한 미소는 지금도 제 마음에 생생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역사, 문화,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수업을 시작할 때 함께 기도했고, 한국 민요와 기독교 찬송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또한 한국의 명절들, 특히 추석과 설날에는 특별한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아둘람 한글학교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더 많은 학생들이 등록했습니다. 1년 후에는 약 50명의 학생들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즈벡 학생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알리샤(13세, 우즈벡명: 알리샤 카디로바)라는 우즈벡 소녀는 처음에 한국 문화에 호기심이 있어 등록했는데, 지금은 한글을 매우 잘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은 학교가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문화 공동체, 영적 공동체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한글학교 출신 학생들의 한국 취업과 꿈의 실현


아둘람 한글학교에서 가장 뿌듯한 일은 여학생들이 한국으로 취업을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학교의 첫 졸업생이자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학생이 바로 나디라(현재 23세)입니다. 나디라는 우즈벡계 고려인으로, 아둘람 한글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학업에 매우 성실했으며, 한글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도 깊이 있게 추구했습니다. 나디라가 한국으로 취업을 가겠다고 결정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취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모국을 방문하는 것이자, 자신의 뿌리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디라가 한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서류 작업을 지원했고, 한국 문화 적응 교육을 제공했으며, 영적 격려를 나누었습니다. 2022년 3월, 나디라는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현재 서울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우리와 연락을 취하며, 한국 생활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교회도 다니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의 깊이에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디라 다음으로 한국 취업을 가게 된 학생이 아이샤(현재 21세)입니다. 아이샤는 고려인 3세로, 나디라보다 더욱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그녀의 증조할머니가 한국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더욱 한국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샤는 현재 대전의 한 전자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급여의 일부를 한글학교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뿌리와 자신의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타미라(현재 20세)라는 우즈벡 학생도 한국으로 취업을 갔습니다. 타미라는 우즈벡인이지만, 아둘람 한글학교에서 한국 문화에 매료되었고, 한국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인천의 한 의류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한국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학생들의 성공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과 한국 사이의 문화적 교량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 학생들이 한국에서 좋은 증거가 되고, 한국 기독교를 배우고, 결국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부화기 사업과 농촌 경제의 변화


우리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역은 부화기 사업입니다. 약 6개월의 준비 과정을 거쳐, 우리는 2011년 초에 첫 부화기 3대를 우즈베키스탄에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목사님이 설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부화기 설치와 운영은 아비로우가 주도했습니다. 아비로우는 부화기 기술을 배우고, 주변 농민들에게 교육했으며, 함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화기 사업의 첫 수혜자가 된 사람이 라흐모(55세, 우즈벡명: 라흐모 카마로프)라는 농민이었습니다. 라흐모는 평생을 닭 사육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전통적인 방식은 부화율이 낮아 많은 손실을 입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부화기는 라흐모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첫 부화 사이클에서 그는 약 2,000마리의 병아리를 성공적으로 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전통 방식보다 3배 이상 많은 것이었습니다. 라흐모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감사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라흐모는 우리의 사역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농민들에게 우리의 부화기를 소개했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지금 타슈켄트 주변 지역에는 우리의 부화기를 이용하는 약 15명의 농민들이 있습니다. 각 농민들의 소득은 평균 30% 이상 증가했습니다. 우리가 부화기 사업을 통해 보인 것은 단순한 경제적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비로우는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부화기 사업과 영적 사역을 함께 진행했습니다. 아비로우는 자신의 농장에 작은 예배실을 만들었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 부화기 사업에 참여하는 농민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약 10명 정도가 모였지만, 지금은 약 30명이 정기적으로 모입니다. 이 사람들은 완전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서히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농촌 순회 우물 파주기 사역과 생명의 물


우리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역은 순회하며 가장 낙후된 지역에 우물 파주기입니다. 타슈켄트 주변의 많은 농촌 지역에서 깨끗한 물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일부 지역은 지표수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소금기 있는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런 물 부족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022년부터 순회 우물 파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역을 우리와 함께한 사람은 산자르(41세, 우즈벡명: 산자르 아흐마도프)라는 우즈벡 남성입니다. 산자르는 원래 건설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는데, 우리의 사역에 깊이 감동하여 2명의 사람들을 모아 우물 파기 팀을 구성했습니다. 우리들의 팀은 정기적으로 타슈켄트 외곽의 여러 마을을 방문하여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첫 우물을 판 마을이 카란다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약 300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깨끗한 물을 구하기 위해 매일 수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산자르 팀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매우 의심스러웠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종종 사기나 거짓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자르 팀은 꾸준히 일을 진행했고, 약 2주일 후에 첫 우물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물에서 맑은 물이 솟아올랐을 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와 환호했습니다. 마을의 한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광경은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약 25개의 우물을 파주었습니다. 각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의 이야기를 말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육신의 물뿐만 아니라 영혼의 물, 즉 주님의 말씀이 필요함을 설명했습니다. 이 사역을 통해 많은 우즈벡 무슬림들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언가 요구하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그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즈벡의 기독교 현황과 우리의 영적 도전


우즈베키스탄에서 기독교의 현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인구 약 3,400만 명 중 약 88%가 무슬림입니다. 기독교인은 약 1% 미만으로 추정됩니다. 더 문제는 정부가 종교를 매우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활동에 대한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미허가 종교 활동은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근본주의 극단주의자들로부터의 위협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사역은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개적인 전도나 집회를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실제적인 도움과 섬김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비로우는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깊은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고 있으며, 때로는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비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 형제님, 제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 제 가족과 제 사회에 많은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을 만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결정이라고 확신합니다. 비록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담긴 말들은 저에게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기독교 상황은 어렵지만, 지하교회의 전통 속에서 깊은 신앙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 계속해서 사역해나가고 있습니다.


한인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문화적 교량 역할


우즈베키스탄의 한인 사회는 매우 흥미로운 공동체입니다. 고려인들의 대부분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즈벡 문화와 러시아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깊은 향수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둘람 한글학교는 이러한 한인 사회와 우즈벡 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통해 우즈벡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배우고 있으며,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되찾고 있습니다. 또한 한인 사회 내에서 우리의 기독교 사역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박순희 할머니는 우리 사역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입니다. 그녀는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의 사역을 통해 그녀의 신앙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가까이 80을 넘었는데, 내가 살아있으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보다니요. 주님께서 정말로 역사하시는 것 같아요." 박일호 또한 우리와 함께 깊이 있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한글학교의 자문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의 영적 파트너입니다. 그는 고려인 공동체 내에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관심을 가지도록 중보하고 있습니다. 한인 사회 내에서 우리의 사역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고려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이 아둘람 한글학교에 다닐 수 있어서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한글을 배우고, 한국 문화를 배우고, 동시에 기독교 신앙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 보물을 동시에 얻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의 부화기 사업과 우물 파기 사역도 우즈벡 사회에서 우리의 신뢰도를 높여주었습니다. 이제 우즈벡 사람들도 우리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역의 미래와 주님 나라의 확장을 향한 비전


지난 10년간의 우즈베키스탄 사역은 저에게 매우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아비로우, 산자르, 알리야, 누르굴, 라흐모,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은 제 신앙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심었던 씨앗들이 이제 싹을 틔우고 있으며, 작은 열매들이 맺혀나가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영혼들이 주님께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둘람 한글학교를 더욱 확대하여 더 많은 고려인 자녀들과 우즈벡 학생들이 한글을 배우고 기독교 신앙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화기 사업을 더욱 확대하여 더 많은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물 파기 사역을 계속해서 더 많은 마을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넷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지하교회의 전통 속에서 깊이 있는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은 복잡하며, 미래에도 많은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광활한 대지에서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일지라도, 깊이 있는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비로우와 같은 헌신적인 사람들이 있고, 산자르와 같은 봉사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박순희 할머니와 박일호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과 헌신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영혼들이 점점 주님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 김동석은 이 귀한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여러분의 기도와 중보를 간절히 청합니다. 또한 아비로우와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신자들을 위해 중보해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즈베키스탄을 향한 사랑을 계속 허락해주시고, 이 땅의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글: 김동석 간사)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선교지에서

ⓒ 복음전도자 조수아 선교사 & www.joshuastory.net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전체댓글 0

추천뉴스

  • 佐賀県, 大町町(오마치초)
  • 佐賀県, 江北町(코호쿠마치)
  • 佐賀県,白石町(시로이시초)
  • 佐賀県(사가현),上峰町(카미미네초)
  • 佐賀県(사가현), 基山町(키야마초)
  • 佐賀県(사가현), みやき町(미야키초)
  • 佐賀県(사가현) 太良町
  • 주고쿠 지방 중부의 히로시마현 북동부에 있는 쇼바라시(庄原市)
  • 아부정(阿武町)은 일본 야마구치현 북부에 있는 정입니다.
  • 오이타현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한 마을에 있습니다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영혼들과 함께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